나의 어릴적
어릴적 난 공주 취향도 아니었다
오빠와 나 두 남매가 서로 다른 취향을 때로는 공유하고 또 때로는 따로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유치원 때는 오빠랑 둘이서 바쁜 엄마아빠를 핑계삼아 TV와 물아일체가 되어 살았고(아마도 그 때문에 내가 만화가 아닌 드라마를 좋아하게 된 계기랄까. 어릴적 드라마는 나에게 참 새로운 세계였다.)
초등학교, 우리 땐 국민학교였지.
국민학교 때는 친구들이랑 엄마가 저녁 밥 먹으러 오라고 할 때까지 끝까지 운동장에 남아서 놀고있는 친구였다.
고무줄, 오재미, 개뼈다귀, 발야구, 피구 등 두루두루 섭렵하지 않은 게임이 없었고
남자 아이들보다 더 활동적으로 놀았던 것 같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고 여중 여고를 다니게 된 난
조금 중성적인 학생이 되었고 아기자기한 여중 여고생과는 달리
그냥 현실적인 어른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이벤트와 마케팅 부서를 거쳐가며 지독히 현실적인 업무를 맡아하며
나에겐 감성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연애와 노래밖엔 없었다.
그러던 20대의 마지막 즈음
몇날 며칠을 야근으로 피폐하게 살던 난
결심했다
떠나야겠다 어디로든
새로운 세상 NY
그리고는 어학연수를 핑계삼아 뉴욕으로 향했다.
그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현재 남편) 역시 쿨하게 나의 뉴욕행을 이해해 줬고
내 생애 가장 자유롭고 가치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10대 20대를 보내며 내가 가지고 있었던 작고 초라했던 감정들을 다 보내고
정말 자유롭게 뉴욕의 시간을 만끽했다
만으로 29살이라는 나이에(한국에선 30이 되었다고 슬퍼했을 그 시절에 난 다시 29살을 보낼 수 있게 된거다.)
뉴욕에서 난,
센트럴파크 잔디밭에 턱하니 앉아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하고
학교에서 집까지(맨하튼에서 퀸즈) 마냥 걸어도 보고
지하철을 이리저리 타고 다니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에는 시도해 보지 않았던 옷과 악세사리들을 마음껏 시도해보고
얼굴보다도 더 큰 피자 하나로 점심을 때우고
플리마켓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구제 제품을 하나하나 사 모았다.
어눌한 영어로 사람들과 소통했다.
난생처음 혼자 사는 것도 해 보고(멕시코인의 집에 방 하나를 렌트했었다)
와인을 홀짝홀짝 대며 가끔씩 찾아오는 지독한 외로움도 삭혀봤다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행동했다.
누가 봐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그냥 내가 하고싶은 대로 마음대로.
걷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일까
그냥 그 곳에서 걷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걷고 또 걷고
뉴욕에서 버린 신발만 세켤레가 넘는다
다 너무 걸어서 헤져버렸다.
그렇게 10개월가까이의 내 생애 가장 멋진 시간들을 보내고
난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충만해진 채로
손으로 만드는 나만의 세상의 시작
다시 돌아온 난
달라져있었다.
30대라는 나이가 부담스럽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 해야 한다라는 중압감도 한결 덜었다
마음은 너그러워졌고 사고는 깊어졌다
물론 그것이 현실을 해결해 주진 못했다.
취업을 하지 않으려고 주도적으로 진행했던 인터넷 사업이 망하고
뉴욕에서 돌아온지 6개월 만에
난 또 다시 마케팅 부서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때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끄적거리는게 좋았다.
어릴 때 엄마 손에 이끌려 친구 엄마가 하는 화실에 다닌적이 있었다.
그림에 흥미도 재능도 없었던 나는
너무 다니기가 싫어 매번 핑계를 대며 화실에 나가지 않았고
결국 엄마는 다시는 날 미술과 연계되는 활동을 시키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난 손으로 하는 것엔 재능이 없다 굳게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뉴욕을 다녀오고 난 후 부터 (아니 실제로는 뉴욕에서부터)
난 드로잉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잘하는 사람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르는 실력이었지만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벅차올랐다
내가 할 수 있다니
내가 하고 있다니
그 때 부터였다
손으로 하는 모든게 재미있어졌다.
심지어 글씨를 쓰는 일 조차